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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도서관! 다음 차례는…

[프레시안 books] 애드 디 앤절로의 <공공 도서관 문 앞의 야만인>

애드 디 앤절로의 <공공 도서관 문 앞의 야만인>(송경진·차미경 옮김, 일월서각 펴냄)이 번역 출판되었을 때 나의 트위터 타임라인에 이 책 이야기가 꽤 많이 올라왔다. 가장 많이 언급된 구절.

"공공 도서관은 마치 갱 속의 공기가 오염되었을 때 가장 먼저 갱 속으로 날려보내는 카나리아와 같다. 공공 도서관은 민주화된 문명사회의 퇴조에 따른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기관이며, 지식이 정보와 오락의 차원으로 퇴보할 때 가장 먼저 그 징후가 나타나는 곳이다." (26쪽)

특히 도서관 사서들은 이 말에 많은 공감을 표했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설명하려는 것은 공공 도서관과 그것으로 감지해 낼 수 있는 민주화된 문명사회가, 이미 퇴조해 버렸다는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책은 오염된 공기에 곧 죽어버릴 것 같은 카나리아에게, 미리 쓴 추도사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공공 도서관을 포함해서 그동안 우리가 공공성에 기반한 공공 서비스 제공 기관으로 알고 있던 학교라든가 공중 보건 기관 등 거의 모든 기관도, 역시 갱 속에 오염된 공기가 번지는 상황은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공공 도서관 관계자들이나 이용자들뿐 아니라 문명사회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왜 지금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자꾸 멀어지나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이 책을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와 그것이 민주적 문명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는 좋은 공공 도서관이 민주주의 발달과 풍요로운 시민의 삶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미국에서도 이젠 공공 도서관이 그 자체의 존재 이유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국이 그렇다고? 그렇다. 이 책은 영원히 공공 도서관과 함께 민주주의를 누리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 갈 것 같던 미국에서, 공공 도서관과 사서들이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라는 야만에 위협받고 있다고 말한다.

▲ <공공 도서관 문 앞의 야만인>(애드 디 앤절로 지음, 차미경·송경진 옮김, 일월서각 펴냄). ⓒ일월서각
 
우리는 미국 공공 도서관의 모습이 발전되고 세련된 공공 도서관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오히려 야만의 침탈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으니 적지 않게 당혹스럽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미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공공 도서관이 폐관하거나,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위기로 인해 그 운영과 서비스가 축소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위기가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에 걸친, 공익에 대한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의 공세에 의한 사회 위기의 한 단면이라는 사실을, 이 책은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시민들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 자신들의 의견을 제대로 표현하고 이성을 토대로 한 타인과의 토론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찾아가는 것보다는, 표면적이고 재미에 충실한 일상을 좇아 사는 것이 익숙하고 또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의 공공 도서관은 이 책의 저자나 역자가 바라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합리적 이성을 가진 시민들이 함께 모여 숙고하고 토론하는 열린 교육의 장"으로서의 가치나 가능성을 지닐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 공공 도서관과 사서들이 합리적 이성을 지닌 시민들의 공론장으로서, 또한 잘 정비된 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문화의 문지기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왔을까? 원래부터 그런 가치를 가지지 않았고 그런 역할을 수행해 오지 않은 것이라면? 이처럼 이 책을 읽는 동안, 구체적으로 우리 공공 도서관 현실과 맞물리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야만에 침탈될 위기에 처한 공공 도서관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공공 도서관의 본래의 가치와 가능성을 제대로 드러내고 시민의 전 생애를 통한 보편적 교육을 강화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은 누가 할 것인가? 바로 공공 도서관 사서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캐슬린 드 라 페냐 매쿡(사우스플로리다대학 도서관정보학과 교수)은 "공공 도서관 사서들이 지적인 엄격함,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 그리고 인류의 기록에 대한 평가와 같은 우리(공공 도서관)의 기본을 지키는데 다시 관심을 갖는다면 공공 도서관의 문은 부서지지 않고 지탱될 것이며, 문 앞을 지키던 야만인들은 물러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서술에서 내가 느낀 것은 역시 '사람만이 문제'이고, 또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점이다.

사실 그동안 공공 도서관이 야만의 힘에 휘둘려 왔다면, 그건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라는 사정 이외에도 결국 공공 도서관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위협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탓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미국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나라 공공 도서관들도 사서가 없는 지경에 처해 있다. 다양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춘 야만의 세력이 공공 도서관 문지기인 사서의 가치와 역할을 축소하거나 역할을 재배치하고 있으며, 더욱 안타깝게도 사서들이 도서관에서 제거되고 있기도 하다. 우리도 지금 이 문제로 공공 도서관 부문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서의 문제, 혹은 사서들이 줄어드는 문제가 다일까. 혹시 지금 공공 도서관이 직면한 위기 상황은, 사실 공공 도서관을 지탱해야 할 시민들이 용인한 현실은 아닐까? 시민 스스로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어울려 잘 살아가겠다는 숙고하는 주체로서의 자격과 역할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포기함으로써 공공 도서관과 같은 공익 기관들이 시장만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공세에 속수무책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특히 우리나라 사정을 살펴보면, 시민들은 사서들에게 공공 도서관을 지켜내라 요구한 적도 없고, 그런 기대도 제대로 표현한 바가 없다. 그런 시민들의 태도가 우리 공공 도서관이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확산의 근거지로서, 사서들이 공공 도서관을 지켜내고 확대하는 문지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지 못한 중요한 이유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지식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기관으로서의 공공 도서관과 사서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것을 호소한다. 그래야 그 본연의 목적과 임무를 구현해 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자는 '불편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공공 도서관에서 제거되고 있거나 애초에 일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많은 사서들에게 저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일까?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주체이지만 단순한 소비자라는 정체성만을 강요당하고 있는 시민들에게는 또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렇게 허전한 채로 책을 덮어야 할까?

일단 공공 도서관이 탄생한 이유와 지금까지 수행해 온 민주주의와 시민 교육 그리고 공익의 옹호라는 참다운 가치를 오늘날 되살려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스스로 야만의 힘을 이겨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 책을 읽은 의미는 충분하다. 구체적으로 참다운 공공 도서관을 지켜내는 일의 일차적 책임은 도서관 관계자나 사서에 있을 것이다. 사서는 공공 도서관 현장에서의 업무 수행 내내 공공 도서관의 가치와 역할을 지켜내고 그러한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사서들을 공공 도서관 문지기로 든든하게 세워야 한다.

시민들은 공공 도서관과 사서가 이러한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지지·지원해야한다. 그래야 우리에게도 야만적인 힘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시민의 자각과 민주주의 역량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성적 담론을 위한 공공의 장인 공공 도서관을 제대로 지켜내고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과연 우리에게 공공 도서관은 정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저 단순히 책 몇 권 빌려보는 시설 정도인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적 이성을 가진 시민들이 모여 숙고하고 토론하게 하는 열린 공동체 마당인가? 그 답은 지금 우리가 내려야 한다. 물론 답변과 함께 실천까지.

저자는 이 책에서 독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락으로서의 독서는 소극적인 소비 행위다. 하지만 교육으로서의 독서는 탐구 과정의 일부다. 독자는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책을 읽지만 독서의 과정은 다시 다른 텍스트에 담긴 새로운 질문으로 독자를 이끈다. 교육으로서의 독서는 독자의 능동적인 개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노동이다." (68쪽)

지금 나는 어떤 독서를 하고 있을까? 질문하는 것을 꺼려하는 우리 사회에서, 교육으로서의 독서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공공 도서관이 탐구 과정으로서의 독서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문 앞에 서 있는 '야만'의 실체를 밝히고 물리치는 첫 시작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용훈 도서관문화비평가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1-08-12 오후 6:07:16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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