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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전자책에 자리 내준 종이책, 고가·소장용 서적만 생존

“종이책은 죽었다. 5년 내에 종이책은 거의 사라져 버릴 것이다.”(미국 MIT 미디어랩의 초대 소장 니컬러스 네그로폰테 교수)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종이책은 나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진짜 내 것이라는 소유감을 준다.”(독일의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 10년 후 세상에서 책은 어떻게 변화할까. 아이패드 등 태블릿PC라는 거센 파도를 타고 밀려오는 전자책이 과연 종이책을 사라지게 만들 것인가. 세계 전자책 시장이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다. 컨설팅업체 PWC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까지 89억4100만 달러(약 9조8000억원)의 시장을 만들면서 연평균 37.2%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경우 이미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아마존은 나라·언어에 관계없이 다운로드를 통해 60초 안에 전자책을 파는 ‘지구촌 서점’ 시대를 꿈꾼다. 

지난달 9일 책의 미래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찾아간 미국 시애틀 북부 테리 애비뉴 440번지. 갓 신축한 듯 산뜻한 6층 쌍둥이 유리벽 건물이 광장을 가운데 두고 서 있다. 지난해 4월 입주를 시작한 ‘세계 최대 전자책 회사’ 아마존닷컴의 본사 건물이다. 아마존 건물은 이곳뿐 아니다. 440번지를 중심으로 부근 11개 빌딩, 약 18만6000㎡(5만6000평)이 모두 소위 ‘아마존 캠퍼스’다.

안내를 맡은 홍보 담당 스테파니 맨틸로는 “시애틀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약 2만 명의 직원들이 2013년까지 이 캠퍼스로 모두 모여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는 아마존에 기념비적인 한 해다. 흩어져 있던 본사를 한곳에 모아 아마존 왕국의 면모를 과시한다. 그뿐 아니다. 기자가 아마존을 찾은 지 열흘 뒤인 19일 아마존 서점 내 전자책 판매량이 전통적인 종이책 판매량을 넘어섰다. 인터넷 서점에서 종이책을 판매한 지 만 15년, 전자책과 함께 리더기인 ‘킨들’을 출시한 지 4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 킨들을 이용하면 80만여 종의 전자책 콘텐트를 무선네트워크로 내려받을 수 있다. 신간은 9.99달러지만, 공짜 책도 1000권이 넘는다. 주로 저작권 보호기간이 지난 고전들이다. 아마존은 현재 미국 전자책 시장의 75%를 장악하고 있다. 시티그룹은 얼마 전 아마존이 킨들 단말기와 전자책 판매로 지난해 25억 달러(약 2조7038억원), 올해 38억 달러의 수익을 거둘 것이라는 분석자료를 발표했다. 지난해 팔린 킨들 단말기는 800만 대였다. 올해는 1750만 대, 내년에는 2625만 대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스테파니는 기자에게 짙은 회색에 6인치 화면을 가진 최신형 킨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두께 8㎜에 무게는 240g에 불과하고, 배터리는 한 번 충전하면 최대 한 달간 쓸 수 있지요.”

국가·언어 관계 없이 60초 안에 다운로드

미국 전체 출판시장에선 요즘 전자책이 종이책을 압도하고 있다. 미국 출판사협회에 따르면 지난 3월 한 달간 전자책 매출은 6900만 달러였다. 지난해 3월보다 146%나 증가한 것이다. 애플 아이패드의 경우 출시 첫날인 지난해 4월 3일엔 25만 권 이상의 전자책이 다운로드됐다.

반면 미국 종이책 시장의 현실은 참담하다. 지난 3월 한 달간 종이표지(paperback)로 된 도서의 판매량은 오히려 8% 줄었다. 미국 2위 서점업체인 보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1위 서점업체 반스앤노블은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이 회사 역시 전자잉크 스크린과 컬러 LCD 스크린이 위아래로 장착된 전자책 단말기 ‘누크(Nook)’를 출시하는 등 생존을 위한 변신에 나서고 있다. 일각에선 2015년까지 미국 전자책 시장 규모가 전체 출판시장의 50%를 차지할 것이란 전망도 내놓는다.

아마존의 킨들 담당 이사인 제이 머린에게 책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그는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을 내놨다. “우리도 3년여 만에 전자책이 종이책 판매를 넘어선 데 대해 놀랐습니다. 지금은 영어로 된 전자책이 주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나라·언어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원하는 책을 단 60초 안에 내려받아 읽어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꿈이죠. 미래를 예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세계 일등 기업으로서 책의 미래를 직접 만들어가고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걸음마 시작한 한국 전자책 시장

반면 우리나라 전자책 현실은 걸음마 수준이다. 전자책은 전체 단행본 시장의 1%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최근 아이패드와 갤럭시탭 등 태블릿PC가 보급되면서 전자책 시장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올해가 사실상 원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통업체 역할을 맡은 교보문고와 인터파크 등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출판사 가운데 전자책과 종이책을 동시에 출간하는 곳도 늘어난다.

국내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는 ‘한국의 아마존닷컴’을 목표로 한다. 현재도 총 8만3000권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전자책을 보유하고 있다. 8만3000권은 국내 단행본 전자책 시장의 60%에 가까운 수치다. 성장률도 가파르다. 올 상반기(6월 12일까지) 전자책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730%나 성장했다. 폭발적인 증가세다. 교보는 아마존처럼 1인 자가 출판이 가능한 기능을 오는 8월께 내놓을 예정이다. 아마존의 킨들과 유사한 전자책 단말기도 연말까지 출시할 계획이다.

교보문고 디지털 콘텐트사업부 성대훈 부장은 “전자책이 2015년이면 전체의 20%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라며 “10년 뒤쯤이면 고가 서적이나 소장용 책을 빼고는 대부분 전자책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단행본 출판 부문 국내 1위인 웅진씽크빅은 지난해 3월 전자책 사업에 진출했다. 6월 현재 약 650종의 전자책 콘텐트를 출시하고 있다. 올해 말에는 약 900여 종, 2012년까지는 1500종의 전자책을 출시할 예정이다. 웅진씽크빅의 이수미 본부장은 “국내 신간의 경우 지난해 10월부터 저자 사전 동의를 받아 종이책과 전자책을 처음부터 같이 출간하고 있다”고 말했다.

SK텔레콤은 ‘3D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의 좀 색다른 전자책을 준비하고 있다. 웹캠으로 기존 종이책과 컴퓨터를 연결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컴퓨터 모니터에 해당 지면의 이해를 돕는 입체 영상과 음성이 나와 설명을 해주는 기능이다. SK 측에서 기자에게 3D 라이브러리를 시연해 보였다. 초고층빌딩 건축기술에 대한 내용이 있는 책을 펼치자 책 앞쪽 컴퓨터 모니터에 입체 화면으로 된 초고층빌딩이 나타났다. 빌딩 한가운데 있는 빨간색 둥근 추가 강풍·지진에 흔들리는 빌딩이 어떻게 균형을 잡아내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기자가 책의 방향을 돌리자 모니터 속 빌딩도 똑같이 돌아갔다. 동영상만이 아니다. 내레이터가 알아듣기 쉬운 말로 내용을 설명한다. 3D 라이브러리는 기존의 전자책처럼 단순히 종이책을 그대로 모방한 형태가 아니라 ‘책’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텍스트와 입체영상, 음성 데이터를 이용해 정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달하겠다는 것이 제작 의도다. SK텔레콤 측은 “지난해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 6개 지역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시범 서비스를 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며 “우선 교과서를 납품하는 출판사들과 연계해 학교 학습용 교재 형태로 시작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책 개념 뛰어넘는 변환모델로 진화

연세대 정보대학원 이준기 교수는 “신기술은 대체모델을 거쳐 변환모델로 진화하면서 성숙된다”며 “지금 나오는 전자책의 주류는 종이책의 단순 대체모델”이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이걸 정말 책이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능이 다양화된 변환모델의 책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책의 모양을 그대로 전자책으로 옮긴 것이 대체모델이라면, SK텔레콤의 3D 라이브러리는 변환모델에 가까운 형태다.

문학동네 최종수 e-북사업부 실장은 “10년 후쯤 되면 전자책이 최소한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 같다”며 “출판사의 역할도 책을 제조하는 데서 벗어나 저자관리와 콘텐트 발굴, 마케팅 등의 쪽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의 책은 독자도 읽는 것을 힘들어하고, 작가도 적은 수입으로 힘들어 한다”며 “미래엔 독자가 보다 읽기 쉽고 즐길 수 있으면서도 작가에게도 이익이 많이 돌아가는 책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전자책의 시대가 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바뀔까. 문자로만 채워진 종이책을 읽을 때는 상상력과 논리력을 기를 수 있지만, 소리와 동영상 등 다양한 자극으로 채워진 전자책의 시대가 된다면 종이책 독서에서 얻었던 능력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전자책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전자책으로 된 동화책에 익숙한 아이들은 종이책을 읽으려 들지 않는다”며 “아이러니하지만 많은 전자책 관계자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겐 전자책 대신 종이책을 읽힌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반대되는 주장도 있다. 세계적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언(1911~1980)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인류는 시각ㆍ청각ㆍ후각 등 오감(五感)이 발달했지만, 문자가 생기고 인쇄매체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시각에 의존하는 부분감각형이 됐다”고 분석했다. 또 “앞으로 전자미디어가 발달하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시공간을 초월하게 돼 오감을 동시에 사용하던 구전문화 시대의 복수감각형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중반을 살다 간 그가 전자책을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주장대로라면 멀티미디어 전자책은 인간의 오감을 모두 자극, 발달시킬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중앙SUNDAY 창간 4주년 기획 10년 후 세상 <13> 종이책 vs 전자책
시애틀=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 제223호 | 20110618 입력